Tag : categorization, identification, 시각, 신경과학
인지갈등과 어려움을 다루기에 앞서서 앎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지갈등이라는 것은 자신이 구성하고 있는 지식 체계와 새로이 접하는 현상과의 불일치로서 설명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앎이라는 것은 주변의 환경에 대해서 이해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한다면, 그 '무엇'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과 관계된 사건이나 인과관계에 대해서 짜임새있게 구성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구성은 자신의 의식으로도 가능하겠지만, 많은 부분이 무의식적으로 이뤄진다. 앞의 [2절]에서 언급한 사회구성주의적 특성을 앎과 연결해 본다면, 자신이 특정 내용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그에 대해서는 자신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미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그렇게 알고 있는 앎이 실제의 앎과 다를지라도 자신의 일생에 있어서 경험한 것에 비추어 보게되면 매우 논리적인 구성인 경우가 많다. 이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쉽게 바꾸지 않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논리적인 전개로 이뤄진 것이므로... 비록 그 앎이 잘못된 것일지라도)
이제 인지갈등(cognitive conflict)에 대해서 다뤄보자. 인지갈등은 자신이 현재 생각하고 있는 특정 대상에 대한 앎이 지각하고 있는 현상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한다고 본다. 이러한 인지갈등은 앎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인지갈등을 경험하는 것은 뇌가 많이 성장하고 경험이 많으면 점점 강해진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장하면서 세계에 대한 뚜렷한 관점이 형성되며, 이 세계에 대한 인식론적, 존재론적 신념이 고착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와 현재 자신이 지각하고 있는 경험이 다르거나 설명하지 못하게 되면, 자신의 생각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렇듯 자신의 생각을 되돌아보게 하는 동기는 바로 인지갈등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4절]에서 언급했듯이 뇌의 활동은 다양한 해부학적 기관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인지갈등을 지각하면, 그것은 단순하게 대뇌피질(정확하게는 Dorsolateral Prefrontal Cortex)에서만 이뤄진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글에서 말하고자하는 어려움에 대한 관점이다. 어렵다는 것은 자신이 불일치 상황을 지각했거나, 그 이후 문제가 잘 풀어지지 않는 경우에 지각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어려움이라는 것은 감정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감정의 역할을 많이 담당하는 편도체에 DLPFC(Dorsolateral Prefrontal Cortex)가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어려움이라는 것은 인지갈등이 일어나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감정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DLPFC에서 편도체로만 신경 신호가 진행한다고 볼 수 없다. 해부학적으로 편도체가 포함된 변연계에서 대뇌피질에 이르는 신경다발은 대뇌에서 변연계로 뻗은 신경다발보다 굵다고 알려져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기본적인 생체적 기능으로부터 이성을 담당하는 대뇌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매우 감정적으로 격정적인 상태에서 우리가 논리적인 해석이나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매우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전개 같으나, 어딘가에 허점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뇌의 사고과정은 아직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 5절 -
님은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로 실수가 적고 자신의 일에 대하여 자부심이 강하므로 자존심에 상처 받는 일을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형으로 공무원이나 은행원, 관료에 적합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후하고 남에게는 인색하며 과단성이 부족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주위에 많지 않고 일에 몰입 하기 보다는 생색내는 일을 선호하는 전형적인 문관 스타일입니다. 한편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면은 있지만 스케일은 작은 편이며 본인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하여 때로 무책임한 행동과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 님은 기본적으로는 조용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으나 자아가 강하여 남의 간섭이나 지시를 받는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보수적인 성격으로 수비 본능이 강하고, 겉으로는 잘 표현하지는 않으나 고집도 무척 센 편입니다. 윗사람의 지시도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드러내놓고 "아니오"라고는 하지않지만 돌아서서 자기 고집대로 하는형입니다.
이제까지 이야기한것은 님의 기본적인 성격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쉽게 잘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성격과 개성이 있습니다. 님에게는......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은근한 고집과 뚜렷한 자기주장 있으며 한번 마음 먹은 것이라면 묵묵하게 관철해 나가며 자존심이 강한 성격
그때 그때의 분위기에 잘 맞춰 잘 놀기도 하고 때때로는 한없이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는 성격
무척 예민하고 감정의 기복이 있고, 사소한 일에도 신경이 곤두서기도 하여 심하면 주위 사람을 불편하게도 만드는 성격
겉보기와는 달리 의외로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가끔은 상식을 초월한 생각속에 빠져들기도 하는 성격
정이 많고 남들과 되도록이면 잘 지내고 싶어하는 형으로, 이성에 대한 관심 또한 대단히 높은 성격
조용하지만 그 정반대로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변화를 추구하고 낯선 것이나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
현실의 상황이 어떻든지 절대로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게 되고 그 결과가 만족 스럽지 못하면 정신적인 갈등을 겪게되어 심하면 그것이 누적되어 돌발적인 행동을 할수도 있는 성격
가족에 대한 사랑이 깊고 논리적인 사고가 뛰어나 사리의 분별이 명확하며 새로운 것을 빨리 적응하고 익혀 다른 사람을 능가할 수 있는 능력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단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판단하면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추진하는 성향이 강하므로, 때때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는 성격 등이 숨겨져 있습니다.
---------------------------------------------------------------------------------
이런 글을 읽을 때 마다 흥미를 느낀다. 현재의 내 상황에 맞춰보고 앞으로의 일을 상상해본다. 하지만 이것을 단지 즐기는 것일뿐... 나의 온전한 모습은 아니다.
'참과 거짓에 대한 사색'
내가 어떤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은 그것이 나의 판단 기준에 추호도 의심이 없을 때 비로소 참이 된다.
그런데 현재 내가 배우고 있는 여러 과학적 지식들은 나 역시 명쾌한 설명을 하기 힘들다. 이에 나는 항상 거짓의 명제로 일관하는 삶을 살고 있다.
추가로, 진실된 참이라는 것을 말할 수 없지만, 내면적 참이라는 것은 가능하다. 내면적 참이라는 측면에서 솔직히 나는 내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다는 명제에 대해 거짓 명제라고 판단하게 된다.
- 내면적 참에 이르는 길은 매우 힘들고 고단하다.
ps1. 2007년9월21일 현재에도 나는 아직 참의 명제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ps2. 진실된 참 = original truth의 의미로 바꾸면 더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
- 도킨스에게 흔쾌히 도발당하기 -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리리라는 것은 익히 예견된 일이었다. 단지 그의 이름값 덕은 아니다. 그보다는 금세기 전환기에 옴진리교와 9ㆍ11처럼 종교가 얽힌 큰 사건들이 속속 터지면서 종교에 대한 비판적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이런 종류의 책이 여럿 나왔고, 『만들어진 신』도 그 중 하나다. 그 인기는 실로 대단해서 심지어 과학서와 인문서가 홀대받는 국내에서조차 가히 열풍이라 할 정도로 많이 읽히고 있다. 아마도 국내에서 그 인기는 사학법 논의, 종교인 과세 논쟁, 이랜드 분규,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처럼 종교, 특히 개신교가 연루된 일련의 사건이 낳은 효과인 듯하다.
그런데 좀 의아한 구석이 있다. 사실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이 태반인 책인데 왜 이렇게 인기인 걸까?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 책이 방대한 인용과 뛰어난 편집의 산물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이 책의 토대, 즉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라는 무신론 명제는 19세기 유럽 사상가들이나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이오니아 학파에게서도 익히 들을 수 있었던 말이다(포이어바흐, 『종교의 본질에 관하여』).
철학이나 상식을 동원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던 시도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는 3장의 논의도 다른 이들의 기존 작업에서 더 나아가지는 못한다(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또 황당한 창조과학에 대한 대안으로 각광받는 어설픈 지적설계 이론에 대한 4장의 비판 역시 다른 이들이 제기했던 기존 비판과 그리 다르지 않다(호트, 『다윈 안의 신』, 키처, 『과학적 사기』).
더 있다. 여자와 아이 심지어 가축까지 학살하는 정복 전쟁과 여성, 성적소수자, 장애인, 타민족, 타종교에 대한 차별로 가득한 성서 내용에 대한 7장과 8장의 비판 역시 기독교 혐오주의자나 혁신적 기독교인 양 진영에서 줄곧 다루어 온 소재다(스퐁, 『성경과 폭력』).
물론 독창적인 부분도 많다. 도킨스 애독자에게는 좀 낡은 이야기겠지만, 어쨌든 자연선택과 밈(유전적 방법이 아닌, 특히 모방을 통해 전해지는 문화의 요소)이라는 진화론적 원리로 종교의 출현을 설명하는 시도는 제법 설득력이 있다(5장). 또 도킨스가 책 전반에서 내내 반복하는 말, 즉 선택권이 없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것은 명백한 정신적 학대라는 경고는 미래 세대에 대한 그의 애정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무신론적 반종교주의자이기는 하지만, 도킨스가 종교를 마냥 비난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비록 수가 적기는 하지만, 어쨌든 깨어있는 종교인들에게는 존중을 표한다. 그가 비난하는 대상은 존중할만한 데가 별로 없는 나머지 대부분의 종교인들이다. 도킨스는 그들에게 대결의 도전장을 던진다. 당신들이 종교적이라고? 좋다! 누가 더 종교적인지 견주어보자. 종교가 없으면 도덕이 무너진다고? 좋다! 과연 그런지 따져 보자.
또 그는 종교를 빙자해 저질러진 악행들을 나열하면서 종교의 득과 실에 관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한다. 결과는 자명하다. 종교는 도덕을 고양하기보다는 훼손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도덕이란 인간의 상식과 양심에 뿌리박은 유산일 뿐 종교와는 무관하다고 결론짓는다(6장).
독자에 따라서는 도킨스의 도발이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경전을 문자 그대로 믿고 자기 종교만이 진리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특히 그럴 것이다. 물론 그들은 아예 이 책을 들추어 보지도 않거나, 혹시 읽더라도 애써 흠 잡으려는 불순한 의도로 읽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무신론자건 유신론자건, 종교가 있건 없건, 누구라도 이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더욱이 과학, 철학, 역사, 신학, 종교학을 넘나드는 박식함, 폭넓은 인용, 치밀한 논리, 맛깔스런 문장, 신랄하면서도 도를 넘지 않는 독설은 일단 책을 손에 쥐면 놓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도킨스 혼자의 산물이 아니다. 거기에는 진지하게 종교를 성찰했던 이들, 무신론자이건 종교인이건 인간과 종교의 진정성을 고민했던 이들의 목소리가 한껏 녹아있다. 그렇기에 달랑 이 책 한 권을 읽고 그 예리한 비판에 박수치며 마냥 우쭐대거나 기가 죽어 마냥 움츠린다면 책을 잘못 읽어도 한참 잘못 읽은 것이다.
종교에 염증이 난 독자라면 도킨스가 사려 깊은 종교인들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종교적 신념을 지닌 독자라면 도킨스가 제기하는 도전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오만과 두려움을 떨치고 도킨스에게 흔쾌히 도발당하는 독자만이 도킨스와 더불어 또는 도킨스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될 것이다.
김윤성 교수 ,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
완전 공감.
종교인이라면 도킨스의 책을 멀리하기 보단 그로 부터 도발당해 봄 직 함이 어떨까...